박쥐 - 이야기가 아닌 만듦새에 대한 불만

박쥐: 스탠스의 리트머스지


 영화를 몹시 실망스럽게 본 터라 별로 길게 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너무나 적절한 내용의 저 글을 보니 아무래도 몇 시간 전에 올린 성의없는 혹평에 몇 자라도 더 덧붙여야 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이 영화는 개봉 초기에 정말 열띤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수많은 미끼(송강호의 성기나 김옥빈의 연기변신, 가슴노출 등)들이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이제 꽤 진부하지만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여 변해가는 흡혈귀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몹시 관심을 끌었었다. 흡혈귀라는 존재는 영화에서 그 의미에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였을 때 그 시대의 인간이 싸워야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을 투영하는 상징물에서 이제는 그 자리를 좀비에게 내어주고 인간성을 가진, 인간 내면의 욕망을 투영하는 상징이 된다. 앤 라이스 원작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얼마 전의 <렛미인>까지 흡혈귀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모습을 반영하며 좀 더 다차원적인, 깊이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에 박찬욱 감독의 본격적으로 그 존재를 주제로 한 흡혈귀 영화라니 주인공은 신부, 영문 제목도 "갈증" 정말 기대가 되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의 흡혈귀에 대한 담론은 <뱀파이어와 인터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피상적으로 껍데기만 빌려온 것은 아니지만 구도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흡혈귀가 가진 신부라는 직업이 이제까지 다뤄지지 못했던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이지 과연 없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특이한 것이긴 하지만 송강호가 보여주는 갈등과 번민은 오히려 "루이스"의 그것에 훨씬 못미친다. 그가 따르는 도덕률은 그저 따라야하는 것일뿐 영화에서는 거기에 대한 고민도, 성찰도 보여지지 않는다. 믿음을 잃은 신부이기 때문일까. 과거의 남부 뉴올리언즈와 달리 현대의 흡혈귀는 수혈팩과 자살을 도와주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일까. 신부임에도 너무 쉽게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감이 있다.


 이 영화의 중심 축은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기 보다는 권력(힘)에 대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과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을 가짐으로 다른 이를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 통제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이런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것. 또 권력으로 원하던 대상을 얻게 되었을 때의 희열, 그 뒤에 느껴지는 공허함. 권력을 두고 변해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에 영화는 대부분을 할애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도 그렇지만 많은 작품에서 흡혈귀들이 인간성과 야수성의 대결, 살기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았을 수 밖에 없는 존재적 모순과 갈등으로 극중에서 흡혈귀가 되기를 원하는 인물들에게 그 피를 나누는 것을 거부한다면 이 영화는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나누고싶지 않다는 쪽에 더 가깝다.)

 여기까지는 좋다. 내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더라도, 감독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기 보다 그런 군상의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내가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이야기가 힘있게 전달되지 못하고 명확한 주제를 드러내지 못한채 그저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다. (추가: 이런 점은 실수가 아닌 의도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관객이 기준으로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태주(김옥빈)라는 인물의 변화 뒤에 송강호에서 김옥빈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송강호의 캐릭터가 흡혈귀로의 삶을 계속하는 이유도,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도 모두 태주에 대한 욕망에서이다. 2/3의 지점까지, 결국 사람만 바뀌었을뿐 이전과 다를바 없이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려는 태주를 살해하고 흡혈귀로 변화시키는 장면까지는 송강호가 이야기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가질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갈등이 (그러니까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주된 축이라는 가정 하에) 명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뒤로는 김옥빈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주도해나가고 관객의 시점 또한 그녀에게 옮겨간다. 그렇기에 이제는 완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송강호의 캐릭터가 가지는 내적 갈등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루이스"와 "레스타" 혹은 "클라우디아"와 같은 구도를 통해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계속하여 희화화 될 뿐 진지성도 떨어진다. 그리고 김옥빈의 캐릭터는 실질적으로 타인의 시선, 도덕, 권력 등에 제한받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욕망과 그것에 대한 갈등은 찾아볼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우리가 다른 권력들로 인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 욕망도 없고 갈등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물론 욕망은 있지만 그것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영화의 통일성과 일관되게 진행되던 호흡과 흐름을 깨면서까지 덧붙일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을까. 그 이전의 이야기가 비록 진부한 설정이긴 하지만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의의를 가졌을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말미에 비워둬도 좋을 부분을 (과연 그 부분이 비어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억지로 덧붙이고 채워넣음으로 작품의 구성과 가치가 크게 떨어져버렸다.

(추가 : 이 영화는 정교한 장치들로, 아니 너무나 많은 정교한 장치들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장치들이 어떤 주제를 위해 기능하고 보통의 관객들에게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흐름을 끊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해 상징, 대사, 이미지, 이야기 등의 준비된 장치들을 "나열"한다. 이미지나 장면이 주는 강렬한 인상 역시 부분적인 조크로 휘발되어버린다. 내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영화가 섬세하지 않다거나,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만듦새이다. 과도한 장치들로, 비록 그것은 매끄럽게 이어져있지만, 많은 것들이 가리워지거나 전달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소설이 문장이 아름답고 묘사가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듯, 나는 영화가 장면 장면, 부분 부분이 예술적이라고 전체가 예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명작 혹은 걸작이란 작가의 온전한 생각이 100%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제한들이 가해지는 중에 (제작비, 제작자와의 갈등, 촬영장소나 기타 환경적 문제 등) 균형을 이루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중성, 관객의 이해와 상관없이 마음먹고 예술을 하려했다는 것이 (비록 영화는 미끼와 떡밥으로 충만해있지만) 여러곳에서 드러나지만 과연 이 작품이 예술적으로 큰 의의를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 나는 몹시 부정적이다.

by Daimon | 2009/05/16 21:38 | art II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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