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justice), 그 추상성에 대하여

 사실 나는 정의감이 아주 투철한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옳은 것에 대한 믿음이 뚜렸한 사람일수록, 그런 사람일수록 쉽게 자신이 믿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은 폭력적이거나 잔인해지기 쉽다. 우리 주위에서 가볍게는 종교인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 극단적으로는 범인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악독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 증거조작이나 고문을 하는 검사나 경찰까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어디까지가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 모두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상대에게 어떤 행동, 규범을 따르도록 요구할 때에는 그것이 "합의된 정의"인가 아닌가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관습적인 것이든, 명문의 규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든 그것이 사회(집단)에서 받아들여지는 일종의 룰로 전제되어 있어야 비로소 그 "폭력"이 정당화된다. 사법부, 검사나 판사와 같은 권력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의" 역시 합의된 정의이다. 사실 그 기준은 보다 엄격해진다. 그 권력이 법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에 법을 넘어설 수 없다. 법이 추구하는 정의는 사회에 의해 합의된 것으로 명문의 규정이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사법부에 가해지는 비판들 중 사실은 법을 만든 입법자들의 책임으로 사법부에게 그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부당한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추상적으로 헌법과 그것을 수호하는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정의 역시 명문의 규정으로 존재하는 합의된 것이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규범은 오직 헌법과 헌법재판소법 뿐이다. 명문의 규정이 아닌 헌법의 원리, 원칙이나 근본적 결단 등도 그 판단기준이 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권리가 도출되는 재판규범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헌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중대한 침해가 존재하는 상황을 필요로 한다.

 보통 흔히들 헌법의 정신, 역할, 그 목적이 소수자 보호와 다수의 전제에 대한 견제에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으로, 풀어내자면 "소수라는 이유로 헌법이 보호하는 권리가 침해받지 아니하도록 보호한다"가 정확할 것이다. 국회가 통과시킨, 다수에 의해 통과된 법률은 헌법이 명문의 규정으로 보호하는 권리를 침해하여야 위헌으로 선고된다.

 그렇기에 이번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결정이 다수의 전제에 대한 견제, 소수자의 보호 라는 헌법의 목적에 어긋난다는 비난은 다소 부적절한 감이 있다. 권한쟁의심판에서 그 침해를 확인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효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흔히 문제되는 기본권에 대한 침해와 마찬가지로, 헌법 명문의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것이 아닌 "다수결의 원칙에 내재되어 있는 기본적인 원리"라는 해석에서 구체적인 보호를 도출해내어야 한다. 헌법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정도로, 형해화될 정도로 그 침해가 중대함을 요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방식은 지난 행정수도이전 사건에서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았던, 추상적인 가치에 헌법 명문의 규정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법규정에서 수많은 학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각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학설의 시비를 가릴 때에는 조금 여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학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필요한 상황에 적용되어 구체적인 타당성을 가질 때에 그 의의가 있다. 각각의 학설은 각자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9명의 재판관들이 내어놓은 각각의 의견은 각자의 관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법안의 통과 과정에서 헌법을 형해화시킬 정도의 중대한 침해가 있었다고 본 재판관은 무효청구를 인용한 것이고, 명문의 규정이 아닌 추상적인 가치에서 구체적인 보호를 끌어낼 정도의 중대한 침해는 아니었다고 본 재판관은 기각 의견을 내었다. 침해는 존재하지만 입법부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하는 정도의 것은 아니라고, 입법부의 역할이라고 보았던 재판관도 있다. 나는 이번 결정에 분명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타당한 결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외려 인용과 기각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결정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가진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여야 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인 옳은가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추상적인 정의에 투철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것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정의가 아닌 불의로 바뀌게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추상적인 정의는 모호하기에 반박하기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추상적인 정의를 요구할 때에 주의하여야 한다. 추상적인 정의는 언제고 불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의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결론이,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헌재의 겸손한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 우리는 모두가 정의를 외치는, 부정의한 사회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by Daimon | 2009/11/04 05:35 | fragmentary thought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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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ocio at 2009/11/05 16:10
글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은 순교의 열정을 지닌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죠. 그런 사람은 자신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사시 준비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법리상으로 행정수도와 같은 말도 안되는 결정이 아니라 법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결정이라고 하더군요. 말씀대로 각자의 가치관과 일의 기준이 있는 법인데 자신의 확고한 정의로 타인을 함부로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행위, 그리고 일도양단으로 사회의 모든 이슈를 명쾌하게 판단할 것을 주문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Daimon at 2009/11/06 03:03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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